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쿠르스크 전투 (문단 편집) === 정보전의 승리 === 소련군의 예상으로도 독일군이 공세에 나선다는 것은 자명했으나, 문제는 그 시기가 언제냐는 것이었다. 소련군은 5월 초에 독일군이 공세에 나설 것이라고 파악했지만, 성채 작전이 연기되면서 소련군은 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일선 장군들에게 비상이 걸렸는데 상술했듯이 스탈린은 대규모 공세를 주장한 적이 있었고, 이를 [[주코프]]와 [[바실렙스키]]가 설득하면서 겨우 포기하게 만들었었다. 하지만 아무리 전쟁영웅인 주코프라 할지라도 최고 권력자의 심기가 뒤틀렸을 경우에는 계속 방어전을 주장하기가 어려웠다. 이는 결과적으로 스탈린의 주장도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쿠르스크에서 소련군은 독일군을 막아내기는 했으나 예상치를 훨씬 뛰어넘는 극심한 피해가 발생했다. 따라서 수적으로 매우 우세한 전력을 보유한 소련군이 괜히 쿠르스크에서 한방 싸움에 나서주면서 엄청난 피해를 초래했다는 의견도 있다. 결과적으로 쿠르스크에서의 승리는 스타브카가 의도한 대로 독일 기갑전력을 소모시킨 것이 아니라 본인들만 엄청난 피해를 입고 예비 전력들의 공세로 적의 공세를 중단시킨 것이 되어버리면서 차후 공세에도 엄청난 차질이 발생했다.] 그 후 5월 중순이 되자 독일군의 공격이 6월 12일로 연기됐다는 정확한 정보를 입수했으나, 히틀러가 공격을 또다시 7월로 연기하자 소련군 내부에서도 서서히 사기 저하나 병사들의 경계 태세 약화 등의 문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스탈린도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지만, 다행히 42년의 그와는 달리 끈기를 보이며 방어 준비는 계속 진행시켰다. 일본에 있던 소련군의 첩보망은 연기 사실을 즉각 전달했지만, 점차 독일에서 흘린 공격이 취소됐다는 역정보가 보내지기 시작한다. 여기서 영국에 있던 '다섯 번째 사나이'가 활약하게 된다.[* 이 다섯 번째 사나이라는 네이밍에 얽힌 이야기도 재미있다. 소련에 정보를 제공한 4명의 첩자는 전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잡히게 되지만, 이 다섯 번째는 오랜기간 잡히지 않았다. 영국 정보부는 첩자가 5명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이것이 대중들에게도 퍼지면서 '다섯 번째 사나이'라는 별칭이 붙게 되었다. 후일 관련 영화도 제작된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는 [[케임브리지 5인조|소련 정보기관이 포섭한 5명의 대학생]]이 있었는데, 이 중 영국 정보부에 들어간 '다섯 번째 사나이'를 통해서 정확한 정보를 얻어내게 된다. 하지만 그는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쿠르스크 전투 개시 전에 자신의 임무를 포기한다. 어쨌거나 영국 정보부의 정보 수집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소련군은 정확한 정보들을 받을 수 있게 된다. 7월 4일에는 투항한 독일 병사가 7월 5일 새벽 3시에 공세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자백했다. 이어 7월 5일 오전 2시에 소련군 진지에 침투해 지뢰밭을 개척하던 독일군 공병대원을 생포하여 한 시간 후에 공세가 시작된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소련군은 공세가 시작되기 직전 선제 포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히겠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고, 이제 더 이상 망설일 것이 없었다. 주코프 원수는 항공 폭격과 일제 포격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 기습적인 포격에 의한 독일군의 피해는 크지 않았는데, 아직 독일군 대부분이 공격 출발선에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초기에는 독일군이 오히려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를 의심했으나, 더 이상 포격이 이어지지 않자 독일 중부집단군 사령관 [[귄터 폰 클루게|클루게]] 원수는 [[발터 모델]]이 지휘하는 독일 9군에 공격을 명령했다. 드디어 두 달의 기나긴 대치 기간이 끝나고 쿠르스크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